이광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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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은 전한 시대의 장군으로, 뛰어난 궁술 실력과 부하들을 아끼는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한 번에 돌에 화살을 깊숙이 박을 정도로 뛰어난 궁술 실력을 갖췄으며, 한 문제로부터 "만약 고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만호후가 되었을 것"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지만, 양왕 유무에게 인장을 받은 일로 인해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흉노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활약했으나, 작전 중 길을 잃거나 수적으로 열세에 놓이는 등 불운한 사건이 반복되었다. 결국 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에서 위청의 지휘를 따르지 못하고 길을 잃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자 자결했다. 그의 아들 이감은 위청을 공격하다가 곽거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이광의 손자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여 가문이 몰락했다. 이광은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끼는 인품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화는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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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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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명 | 비장군 (飛將軍) |
출생 | 기원전 184년경 |
출생지 | 톈수이 시, 간쑤 성 |
사망 | 기원전 119년 (64-65세) |
직업 | 군사 장군 |
자녀 | 이당호 이교 이건 |
생애 및 경력 | |
활동 시기 | 전한 효문제 시기 |
주요 활동 | 흉노와의 전투 참여 |
별칭 유래 | 뛰어난 기마술과 활솜씨로 '비장군'이라 불림 |
최후 | 모욕적인 임무에 대한 항의로 자결 |
평가 및 영향 | |
역사적 평가 | 용맹함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칭송받음 |
백성들의 추앙 | 죽음 이후 백성들의 애도 |
기타 | |
가문 | 대대로 활쏘기를 업으로 삼음 |
관련 인물 | 이광리 (조카) |
2. 생애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광은 체격이 크고 팔이 길었으며 훌륭한 궁술 실력을 갖추어, 한 번은 돌에 깊숙이 화살을 박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시대 인물인 위청과 곽거병처럼,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사려 깊고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는 또한 문제의 총애를 받아, 문제는 그에 대해 "그가 고조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려움 없이 만호후(万户侯)의 봉토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광은 오초칠국의 난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는 대장군 주아부 휘하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경제는 그가 경제의 형제인 양왕 유무가 준 인장을 받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경제는 양왕 유무가 자신의 아들들보다 자신을 황제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경계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들의 어머니인 두태후도 지지했다. 따라서 이광은 반란 진압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하북의 국경은 흉노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광의 용맹한 기질이 적합하다고 여겨져 그는 그들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광의 만년 군 경력은 후대 학자들이 "불운"으로 여길 만한 반복되는 사건들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는 작전 중에 방향 감각을 잃는 좋지 않은 경향이 있었고, 야전에서 종종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강력한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이광의 명성은 적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이광의 부대의 훈련 부족과 그의 전략적 계획 부족은 종종 그와 그의 부대를 어색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이광 자신은 기원전 129년 안문군에서 벌어진 공격 작전에서 그의 군대가 전멸된 후 간신히 포로를 면했고, 공손오와 함께 가석방을 받은 후 관직에서 삭탈되고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기원전 120년의 별도 작전에서, 이광은 이번에는 그의 아들 이감(李敢)과 함께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다시 포위되었다. 그의 4,000명의 병력은 장건의 증원군이 구조를 위해 제 시간에 도착하기 전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한나라 군대의 규칙은 지휘관의 업적을 자신의 측의 사상자를 뺀 적군 살해 수에 따라 측정했다. 이 점은 이광의 정치적 순진함(양왕 사건에서 드러난 바와 같음)과 함께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제후에 봉해질 기회를 박탈했다. 무제는 심지어 위청에게 이광의 "끔찍한 불운"을 이유로 중요한 임무(선봉대와 같은)에 이광을 배정하지 말라고 은밀히 명령했다.
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에서, 늙었지만 여전히 열정적인 이광은 무제에게 선봉 지위를 약속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불운"으로 악명이 높은 이광을 선봉으로 이끌지 못하도록 대장군 위청에게 은밀히 메시지를 보냈다. 위청은 이광에게 조식기와 함께 황량한 평원을 통과하는 동쪽 측면 경로에서 병력을 합류하도록 배정했다. 이광은 이 배정에 항의하며 화가 나서 본진에서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와 조식기는 길을 잃어 전투를 완전히 놓쳤고, 위청이 연지 선우의 수적으로 우세한 군대에 맞서 고전을 벌여 승리한 후 본대에 합류했다. 그 결과, 이광과 조식기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전투 전략을 위험에 빠뜨린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군사 재판에 소환되었다. 이광은 제후로 봉해지는 충분한 공적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에 좌절감과 굴욕감을 느끼며 명예 자살을 했다. 그의 아들 이감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위청을 비난하고, 위를 공격했으며, 나중에 사냥 여행 중에 그의 상관인 곽거병 (위의 조카)에게 죽임을 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비장군
이광의 증조부 이중상(李仲翔)은 전한의 장군으로, 소창(素昌)[7]에서 강족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다. 이중상의 아들 이백고(李伯考)는 적도로 가 이중상을 장사지냈고, 이때부터 이광의 가문은 적도에 살았다.[8]기원전 166년, 흉노 정벌에 공을 세워 낭(郎)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맹수를 근접전에서 죽이는 그의 무용을 본 문제는 "고조 때 태어났으면 만호후(萬戶侯)가 되었을 것이다……"라며 칭찬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광은 체격이 크고 팔이 길었으며 훌륭한 궁술 실력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시대 인물인 위청과 곽거병처럼, 부하들의 존경을 받는 사려 깊고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그는 또한 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제 때 그는 효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주아부 아래에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다만, 양왕 무에게서 장군의 인수를 받았기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후에 상곡태수, 상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군세를 이끌고 10배가 넘는 흉노군에 포위되었지만, 일부러 복병이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여 흉노군이 추격을 포기하고 군세를 물렸다. 그날 이후 그는 농서·북지·안문·운중태수를 역임하였는데, 이곳들은 모두 한의 변방으로서 흉노의 영토에 인접하는 곳이었다. 당시 흉노에게 비장군 이광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후로도 무용이 뛰어난 무장들은 이광을 모방하여 비장군으로 불리는 일이 관습처럼 되었는데, 후한 말기의 무장 여포도 전례에 따라 비장군으로도 불렸다.
하북의 국경은 흉노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렸기 때문에, 이광의 용맹한 기질이 적합하다고 여겨져 그는 그들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성명 | 이광(李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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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전한 시대 |
생몰년 | 생년 미상 - 기원전 119년 (원수 4년) |
자·별호 | 한나라의 비장군(飛将軍) (별칭) |
본관·출신지 등 | 양주농서군 성기현 |
직관 | 한 중랑(漢中郎)〔전한〕→무기상시(武騎常侍)〔전한〕 |
작위·호칭 등 | - |
진영·소속 등 | 문제→경제→무제 |
가족·일족 | 자식: 이당호(李当戸), 이초(李椒), 이건(李敢) |
2. 2. 비운의 장군
이광은 무제 때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많아 위위로 승진했다. 무제가 마읍에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하려고 했을 때 효기장군으로서 종군했지만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기원전 129년에 흉노와의 싸움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싸움에 진 죄를 추궁당해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우북평태수로 복귀하여 낭중령으로 옮겼다.흉노와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좋은 전과를 얻지 못하였고, 기원전 119년 대대적인 흉노 침공 때에는 고령을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러한 조정의 처사에 분노한 이광은 격렬하게 항의하여 참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익수의 군으로서 후방을 맡게 되었다. 이광은 이에 불복하여 다른 방면에서 독자적으로 진군했지만, 초행길에 길을 안내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제때에 전장에 당도하지 못하였다.
그는 작전 중에 방향 감각을 잃는 좋지 않은 경향이 있었고, 야전에서 종종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강력한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기원전 120년의 별도 작전에서, 이광은 아들 이감(李敢)과 함께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다시 포위되었다. 그의 4,000명의 병력은 장건의 증원군이 구조를 위해 제 시간에 도착하기 전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무제는 위청에게 이광의 "끔찍한 불운"을 이유로 중요한 임무에 이광을 배정하지 말라고 은밀히 명령했다. 기원전 119년 막북 전투에서 이광은 무제에게 선봉 지위를 약속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는 대장군 위청에게 이광을 선봉으로 이끌지 못하도록 은밀히 메시지를 보냈다.
위청이 이광의 부하를 힐문하자, 이광은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위청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대장군 위청이 나를 후방 부대에 두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부하 장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남녀노소 소리없이 울었다고 한다.
2. 3. 가족사와 후손
이광의 장남 이당호(李當戶)는 무인이었으나, 무제의 측근인 한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자 그를 폭행했다. 무제는 그의 과감함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당호는 요절했다. 그의 아들이 이릉이다. 이감(李敢)에게는 이초(李椒)라는 둘째 형이 있었지만, 그도 맏형처럼 일찍 죽었다.이광의 막내 아들 이감(李敢)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위청을 원망하여 술자리에서 그를 구타했다. 위청은 이를 숨겼지만, 위청의 조카 곽거병은 앙심을 품고 이감을 사냥터에서 사살했다.
이감에게는 두 자녀가 있었다. 아들 이우(李禹)는 인색하고 돈에 집착이 강했다. 딸은 황태자 유거의 측실이 되었고, 이우는 유거의 신임을 받아 근시가 되었다. 그러나 사촌 형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자, 이우도 흉노로 도망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릉이 항복하고 가족이 처형된 이후, 롱서(隴西)에서는 이씨를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릉을 변호하던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서량을 건국한 이고는 이광의 후손을 자칭했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이고의 9대손이라고 전해진다.
3. 일화
이광은 청렴한 인물로, 샘을 발견하면 부하들에게 먼저 마시게 하고, 식사도 하사관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모두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몫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러한 이광의 인품에 대해 "도리불언하지성계(桃李言わざれども下自ずから蹊を成す)"(복숭아와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길이 생긴다)라고 평했다.
세이케이 대학, 오사카 세이케이 대학 등의 이름은 이것을 출처로 하며, 배우 마츠자카 토리의 이름의 유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읽는 법은 "'''토리'''").
이광은 궁술의 명수였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으며, 화살은 바위에 박혀 있었다. 이후 이광은 여러 번 바위에 화살을 쏘았지만 박히는 것이 없었다. 이를 양자운에게 이야기하자, 양자운은 "지성이면 금석도 열린다"라고 말했다.
이 고사를 바탕으로 소설 수호전의 등장인물 화영은 "소이광"이라 불린다.
3. 1. 복숭아와 자두나무
이광은 청렴한 인물로, 샘을 발견하면 부하들에게 먼저 마시게 하고, 식사도 하사관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모두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몫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마천은 이러한 이광의 인품에 대해 "도리불언하지성계(桃李言わざれども下自ずから蹊を成す)"(복숭아와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길이 생긴다)라고 평했다.세이케이 대학, 오사카 세이케이 대학 등의 이름은 이것을 출처로 하며, 배우 마츠자카 토리의 이름의 유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읽는 법은 "'''토리'''").
3. 2. 바위에 박힌 화살
이광은 궁술의 명수였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쏘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으며, 화살은 바위에 박혀 있었다. 이후 이광은 여러 번 바위에 화살을 쏘았지만 박히는 것이 없었다. 이를 양자운에게 이야기하자, 양자운은 "지성이면 금석도 열린다"라고 말했다.이 고사를 바탕으로 소설 수호전의 등장인물 화영은 "소이광"이라 불린다.
4. 평가
역사기록은 이광에 대해 청렴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샘을 발견하면 부하들이 먼저 목을 축일 수 있게 배려하였고, 식사도 하사관과 함께 하였으며, 모든 군졸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몫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복숭아나무와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히 사람이 모이고 길이 생긴다"고 평가했다.
이광은 왕창령의 7언 절구 시 "출새(出塞)"에서 그의 별명으로 언급된다. 왕창령은 전쟁이 변방에 주둔한 군대에 미치는 피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특히 이광과 같은 뛰어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의 부재를 지적한다.[4]
일본 제국의 군가인 적은 수만(敵は幾万)에서, 가사는 이광이 화살로 돌을 꿰뚫는 능력을 언급하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결의의 사례로 제시한다.[5]
4. 1. 대중문화
이광은 왕창령의 7언 절구 시 "출새(出塞)"에서 그의 별명으로 언급된다. 왕창령은 전쟁이 변방에 주둔한 군대에 미치는 피해에 대해 언급하면서, 특히 이광과 같은 뛰어난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의 부재를 지적한다.[4]일본 제국의 군가인 적은 수만(敵は幾万)에서, 가사는 이광이 화살로 돌을 꿰뚫는 능력을 언급하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결의의 사례로 제시한다.[5]
5. 가계
이광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장남: 이당호(李当戸)
- 차남: 이초(李椒)
- 막내아들: 이감
이광의 손자는 다음과 같다.
- 이릉: 이당호의 막내아들
- 이우(李禹): 이감의 적자
참조
[1]
문서
4th year of the ''Yuan'shou'' era of Emperor Wu's reign. The year corresponds to 12 Nov 120 BCE to 1 Nov 119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2]
서적
Barbarians at the Wall The First Nomadic Empire and the Making of China
https://books.google[...]
Transworld
2022-01-13
[3]
general history
Berkshire Dictionary of Chinese Biography
https://books.google[...]
Berkshire Publishing Group
2022-01-13
[4]
간행물
Yang, 1993, p. 83-84
[5]
웹사이트
Thousands of enemies may come (Teki wa ikuman, 敵は幾万) 1890s
http://gunka.sakura.[...]
2019-12-09
[6]
문서
『[[史記]]』(卷109):“李將軍廣者,隴西成紀人也。……廣家世世受射。'''孝文帝十四年''',匈奴大入蕭關,而'''廣以良家子從軍擊胡''',用善騎射,殺首虜多,為漢中郎。”“至莫府,廣謂其麾下曰;「廣'''結發'''與匈奴大小七十餘戰,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而又迷失道,豈非天哉!且廣年六十餘矣,終不能復對刀筆之吏。」遂引刀自剄。廣軍士大夫一軍皆哭。百姓聞之,知與不知,無老壯皆為垂涕。而右將軍獨下吏,當死,贖為庶人。”
[7]
문서
적도(狄道).
[8]
문서
[[방현령]], 《[[진서]]》 권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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